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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현장] 금속 여성노동자와 만난 김진숙 조합원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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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캐리어노동조합 작성일20-11-04 07:32 조회2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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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김진숙이 만든 길 따라 우리가 갑니다  

 

[사람과 현장] 금속 여성노동자와 만난 김진숙 조합원 (1)

박재영 편집국장, 사진=박재영, 편집=신동준 | edit@ilabor.org

 

1987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이 전국을 휩쓸었다. 자고 일어나면 수십 개의 노조가 세워졌다. 조금씩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고 노동환경이 나아졌다. 해고됐던 많은 노동자가 공장으로 돌아갔다. 아직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은 돌아가지 못했다.  

 

1997년 경제 위기가 닥쳤다. 국가가 국민이 모아준 금덩이와 세금으로 기업이 진 빚을 갚아 줬지만, 기업은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김대중 정부가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면서 해고는 일상다반사가 됐지만, 몇몇 해고 노동자들은 투쟁 끝에 공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자본은 언제나 김진숙은 안 된다였다. 투쟁할수록 자본은 김진숙의 복직만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1986년 대한조선공사 노조 집행부의 비리를 폭로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대공분실에 끌려갔다가 징계해고 당한 김진숙 대의원은 복직을 요구하며 공장 밖에 서 있었다. 1989년 한진이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했다. 35년을 그렇게 서 있다. 함께 해고된 동지들은 복직했지만, 김진숙은 여전히 복직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그러는 동안 박창수가 죽었고 김주익이 죽었다. 곽재규, 최강서가 세상을 떠났다.  

 

34년 전 눈매가 무섭던 낯선 남자들에게 머리통을 검은 보자기에 덮어씌운 채 대공분실로 끌려갔던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자 김진숙이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에게 물었다.  

 

저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말씀하셨던 문재인 대통령님, 저의 해고는 여전히 부당합니까?”  

 

금속노조 여성위원회가 1022일 김진숙 조합원을 만나 함께 하기 위해 여성조합원 수련회를 열었다. 아침 출근 복직 투쟁을 함께 하며 잠깐이라도 김진숙 조합원의 투쟁에 힘을 보태자는 노조 여성조합원들의 마음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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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이 금속노조 여성조합원들을 만나 노동자로 한평생 살아온 얘기를 나누고 있다. 부산=변백선   

 

금속노조 여성조합원들은 김진숙 언니가 만든 길을 따라 우리가 갑니다라고 쓴 현수막을 걸고 김진숙 조합원을 맞이했다. 지금 김 조합원은 한진중공업뿐 아니라 암과 싸우고 있다. 한 시간 남짓한 강연 내내 김진숙 조합원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눈빛은 단호했다. 김 조합원의 눈은 승리를 내다보고 있는 듯했다.  

 

군계일학 대의원  

 

열여덟 살에 노동자 됐어요. 옷 만드는 공장이었습니다. 동네 친구이거나 친척이었던 여공들은 공장에서 부르는 이름과 기숙사에서 부르는 이름이 달랐어요. 열세 살 이하는 어려서 취업이 안 되니까 신분을 속이고 남의 이름으로 취업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회사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어요.”  

 

어린 여공들은 조장들이 15원에 파는 각성제를 먹으며 잠을 아예 안 자는 곱빼기 철야를 했다. 이 노동자들은 약을 먹고 감각이 마비된 상태에서 재봉틀 바늘이 손가락에 박힐 때까지 일했다. 생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노동자들은 남성 관리자들이 수시로 성추행을 해도 성추행인지 모르고 당했다. 여성 인권은커녕 성추행이 범죄라는 개념도 없었던 때다. 김 조합원은 그때를 나도 아무것도 몰랐던 한심한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김진숙 조합원은 1981년 용접공으로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한다. 남성 조합원 오천 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 조합원이었다. 김진숙은 공장에 다니며 야학에 나갔다. 대학을 나오면 일하면서 욕도 안 먹고 맞지도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야학을 잘못 골랐다.  

 

당시 야학은 노동법을 가르쳐주는 노동야학과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야학이 있었는데 둘을 구분 못 해 노동야학에 들어갔어요라며 김 지도위원은 웃었다. 노동야학에서 전태일과 노동권을 얘기하는 선생에 놀라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 말고는 김진숙한테 존댓말을 하는 곳이 없었다. 신고를 단념하고 계속 노동야학에 다녔다.  

 

김진숙 조합원은 잔업을 받기 위해 직장(반장)에게 술까지 사는 노동자 아저씨들에게 강제 잔업은 근로기준법이 금지하는 불법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아저씨들은 김진숙이 다가오면 근로기준법 온다라며 피했다고 한다.  

 

1986년 대한조선공사 노조 위원장 선거와 대의원 선거가 열렸다. 김진숙 조합원은 대의원에 출마했다. 회사 관리자가 불러 왜 출마하냐고 물었다. 김진숙은 민주노조를 쟁취하러 출마한다라고 대답했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당시 현장 대의원들은 모두 회사 관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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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 여성조합원들이 김진숙 조합원에게 힘내자며 안아주고 있다. 부산=변백선   

 

김진숙 조합원이 출마한 부서만 유일한 경선이었다. 세 명을 뽑는데 여섯 명이 출마했다. 김 진숙 조합원 1위로 당선됐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대의원 88명 중 87명이 사측 관리자였다.  

 

당시 어용노조가 낸 대의원대회 자료집을 보니 살아있는 김진숙 대의원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로 되어 있었다. 더 가관은 다음 페이지에서 살아서 환갑잔치를 벌였다.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다른 조합원들 부모님도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났다. 5천 명이나 되는 조합원의 자녀들은 초등학생까지 모두 결혼했다. 어용노조는 그런 방식으로 경조사비를 떼어먹었다. 다치면 노조에서 주는 위로금 2만 원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30년 일한 노동자도 위로금이 있는 줄 몰랐다. 하지만 김진숙 대의원 이름 옆에 여섯 개의 도장이 찍혀 있고 위로금 12만 원을 받은 거로 되어 있었다. 기본급이 136,100원이던 시절이었다.  

 

웃으며 일하고 퇴근하는 게 노동해방이지  

 

김진숙 대의원은 어용 대의원들이 횡령한 돈을 받으러 다녔다. 집까지 찾아갔다. 돈을 어쨌냐니까, 어용 대의원들은 다 썼다고 대답했다. 대문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떼먹은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김 대의원은 동네에서 유명해졌다. 빚쟁이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김진숙 대의원은 빚쟁이라는 오해를 풀고 어용노조를 더 압박하려고 압박 붕대에 매직으로 단결이라고 쓰고 태극마크까지 그려 넣어 머리에 썼다. 김 조합원은 그때 머리를 띠를 매고 집에서 출발하는데 당시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어요. 그런데 만나는 아저씨마다 진숙아 니 머리 다쳤나?’라고 물어보더군요. 거울을 보니 머리에 두른 압박 붕대가 늘어나 단결이라는 글씨는 보이지도 않았어요라며 웃었다. 어용 대의원들은 생각보다 순진했다. 돈을 돌려줬다. 김 대의원은 받은 돈을 조합원들에게 돌려줬다.  

 

어느 날 현장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 올려다보니 50살이 넘은 아저씨가 저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어요. 그 웃음 하나가 가슴에 확 와닿더라고요. 5년 동안 같이 일했지만, 그 아저씨가 그렇게 웃는 것은 처음 봤어요. 그때 결심했어요. 내가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저 웃음만은 지켜주자고.”  

 

김진숙 조합원은 노동해방이 뭐 거창한 이데올로깁니까. 그렇게 웃으면서 출근하고 퇴근하는 세상이 노동해방 세상이지요라고 했다.  

 

관리자만 보면 피하던 노동자들은 더는 관리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현장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어느 날 관리자가 보자고 하여 나갔다가 낯선 남자들에게 검은 보자기에 씌워진 채 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차가 어딘가에 도착하는 듯하더니 충성하는 경례 소리가 들렸다. 부산지방경찰청 대공분실이었다.  

 

<2편으로 이어갑니다